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데리코 펠리니 (문단 편집) === 전성기 === 1954년, 펠리니는 자신의 초기 네오리얼리즘 대표작 중 하나인 《[[라 스트라다|길]]》를 감독하게 된다. 배우 앤소니 퀸과 펠리니의 아내였던 줄리에타 마시나가 각기 거친 성격의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와 악기를 연주하는 순진한 처녀 "젤소미나"를 열연한 이 명작은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펠리니가 감독한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은 감독에게 수여되는 상이 아니다. 부문 개설 첫 해에는 [[아카데미 작품상|작품상]]처럼 [[영화 제작자|제작자]]에게 수여되는 형식이었다가, 그나마도 바로 그 다음해부터 현재까지 계속 아예 '''출품 국가에 수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페데리코 펠리니는 경쟁 부문에서는 단 한 번도 오스카상을 받은 적이 없다. 그가 받은 오스카상은 오로지 비경쟁 부문인 [[아카데미 공로상|공로상]]을 받은 것이 유일하다.] 이는 1957년에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2020년 현재는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으로 시상 부문 명칭이 변경되었다.]이 경쟁 부문으로 개설되면서 최초로 수상한 것이다.[* 작품은 1954년에 완성됐는데 1957년에서야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것은,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제작 후 2년이 지난 1956년에서야 미국에서 개봉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사기꾼들》(1955)과 《카비리아의 밤》(1956) 등을 감독하였으며 이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펠리니의 아내 마시나가 다시 주연을 맡은 《카비리아의 밤》은 또다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면서 그가 감독한 작품 중 두 번째로 오스카상을 받았다. 마시나도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탈 정도로 명연기를 펼쳤다. 이후 《[[달콤한 인생]]》(1960)을 감독하여 또다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작품으로 펠리니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달콤한 인생 부터 펠리니는 네오 리얼리즘에서 탈피하여, 시각적인 강렬함과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미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 시도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바로 《[[8과 1/2]]》 (1963)이었으며,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면서 펠리니의 작품 중 세 번째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작품이 된다. 이후 펠리니는 《영혼의 줄리에타》(1965)를 감독했다. 이는 펠리니 최초의 컬러영화였으나 흥행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였고, 이 일로 인하여 펠리니는 《달콤한 인생》 제작 때부터 7여년을 함께 일해온 제작자 안젤로 리촐리와 결별하게 된다. 다만 영화는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고 현재는 대표작 리스트로 거론되고 있다. 《펠리니 사티리콘》(1969)는 그의 영화인생의 절정기를 장식한 작품으로, 고대 로마의 문장가 [[페트로니우스]]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소설 《[[사티리콘]]》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이 작품은 제작자들로부터 주어진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지금까지 펠리니 자신이 감독했던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거대한 세트와 화려한 색감의 화면을 자랑했고, 흥행과 비평 모두 괜찮은 성공을 거두었다. 펠리니는 이후 《광대들》(1970), 《로마》(1972) 등을 감독하였다. 또한 《아마코드》(1974)[* 《나는 기억한다》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를 감독하였고, 이 작품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면서 펠리니의 작품 중 무려 네 번째 오스카상 수상작이 되면서 그는 전성기의 커리어를 화려하게 마무리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